1. ‘서체저작권’이 아니라 ‘서체프로그램 저작권’이라고 불러야 한다.
폰트저작권이라고도 불리는 서체저작권을 둘러싼 분쟁은 최근 몇 년 간 끊임없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는, 저작권 분쟁 중에서도 일종의 스테디셀러 격의 분쟁이다. 그리고 반복된 분쟁으로 인해 법적인 쟁점도 많이 정리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정작 정리된 법적 결론들이 현실에서는 아직도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서체저작권’이라는 명칭 자체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서체저작권’이라는 명칭은, 마치 서체가 저작물인 것 같은 느낌, 서체 자체에 저작권이 발생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명칭 자체가, 분명히 ‘서체’와 ‘저작권’의 결합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체 자체의 저작권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서체도안의 창작성 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이 아니라, 서체도안에 내포되어 있는 창작성을 문자 본래의 실용적인 기능으로부터 분리하여 별도로 감상의 대상으로 하기 어렵다는 점에 근거한 것 (서울지방법원 1998. 2. 24. 선고 97노1316 판결).
대법원이 인정하는 서체와 관련된 저작권은, 서체 프로그램(=서체 파일)의 저작권이다. 서체의 모양이 아니라 서체 프로그램에 저작권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서체저작권’이라는 명칭은 정확하지 않으며, ‘서체프로그램 저작권’이라고 바꿔 부르는 것이 맞다.
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는 점을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서체프로그램 저작권’이라는 명칭이 서체 관련 저작권 분쟁에 대한 많은 오해를 근본적으로 불식시킬 수 있다는 점은, 직관적으로도 알 수 있다.
특히, ‘서체저작권’이 아니라 ‘서체프로그램 저작권’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면, 서체 자체가 현출된 결과물(예컨대 윤서체를 사용하여 작성한 문서, 그 문서를 인쇄한 인쇄물 등)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서체프로그램에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즉, 서체의 모양을 복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서체프로그램을 불법복제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서체프로그램 저작권의 침해는 언제 성립하는가?
우리가 흔히 ‘서체저작권’이라 부르는 것이 사실은 ‘서체프로그램 저작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고 나면, 서체프로그램 저작권의 침해는 언제 성립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대법원은, 서체프로그램을 컴퓨터프로그램 저작물로 인정함으로써, 그 저작권 발생을 선언한 바 있다. 따라서 서체프로그램의 저작권 침해 여부는, 일반적인 컴퓨터프로그램 저작물의 저작권 침해 여부 판단과 동일한 기준이 적용된다.
예컨대 서체프로그램을 불법복제한 경우에는 복제권 침해가, 서체프로그램을 불법개작한 경우에는 2차적저작물작성권 침해가 성립하는 것이다.
다만 현실적으로, 사용자가 서체프로그램을 정상적으로 복제했는지 불법복제했는지를 저작권자가 스스로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실무에서는 저작권자가 특정 서체가 사용된 결과물(인쇄물이나 문서파일 등)을 증거로 삼아 사용자에게 ‘서체프로그램의 불법복제를 하지 않았느냐’고 주장하고, 사용자는 ‘그 결과물을 만드는 데 사용된 서체프로그램을 직접 복제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외주업체다’ 라든지 또는 ‘서체프로그램을 적법하게 복제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등의 반대 주장을 함으로써 분쟁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 한글 프로그램에 이미 내장되어 있는 서체가 자동으로 PPT 프로그램에도 뜨게 된 경우에는 PPT 프로그램에서 그 서체를 사용해도 된다.
번들서체, 즉 특정 프로그램에 이미 내장되어 나오는 서체이다. 예컨대 한글과컴퓨터사에서 판매하는 한글 프로그램에 처음부터 내장되어 있던 서체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컴퓨터에서는 이 번들서체들을 한글 프로그램 뿐만이 아니라 다른 프로그램, 예컨대 PPT 프로그램이나 캐드 프로그램 등에도 자동으로 뜨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사용자는 각각의 번들서체들이 어느 프로그램에 최초로 내장되어 있었던 것인지 일일이 외우고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아무 생각없이 그 번들서체들을 여러 프로그램에서 자유로이 사용하게 된다.
이것이 적법할까?
이러한 사용의 적법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일시적 복제의 면책조항 적용 등 복잡한 법리들이 동원될 수도 있고, 필자는 여러 법리의 종합적 적용의 결과 위와 같은 사용은 적법하다는 입장이지만, 다행히 이렇게 복잡한 내용을 나열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주는 법원의 판례가 존재한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14. 5. 1. 선고 2012가합535149 판결>
원고는 이 사건 동영상에 피고 한양정보통신의 서체를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아래한글' 또는 'MS워드' 프로그램에 번들(bundle)로 포함되어 제공되는 서체파일들로서 위 프로그램을 설치할 때 원고가 사용하는 문자발생기에 위 서체파일들이 자동으로 문자발생기의 운영체제인 Windows 폴더의 하위폴더인 Fonts 폴더에 저장되고, 위 저장된 서체파일들은 위 프로그램들 이외에 다른 프로그램을 사용할 때에도 해당 프로그램을 자동으로 인식하여 사용이 가능하였던 것이므로, 이러한 방식에 의한 사용은 저작권 침해행위의 유형인 복제, 전송, 배포 등에 해당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작권법 제124조 제1항 제3호에 규정된 프로그램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살피건대, (중략) '아래한글' 프로그램에는 위 피고의 위 6종의 서체들 중 '피오피'체를 제외한 나머지 서체('동녘', '울릉도', '수평선', '엽서', '목판')들이 번들로 제공되는 사실, 위 프로그램을 문자발생기에 설치하면 번들로 제공된 서체들이 자동으로 문자발생기의 운영체제인 Windows 폴더의 하위폴더인 Fonts 폴더에 저장되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바,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원고가 위 프로그램을 문자발생기에 설치하는 과정에서 위 피고의 '동녘', '울릉도', '수평선', '엽서', '목판'체가 자동으로 문자발생기의 운영체제에 저장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과정은 위 프로그램 개발자에게 서체파일에 관한 라이센스를 부여한 저작권자들이 적어도 이를 묵시적으로 허락하였다고 할 것이므로, 원고가 위와 같은 방식으로 원고의 문자발생기에 저장된 서체들을 사용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정만으로 원고가 해당 서체들을 무단으로 복제·사용하여 위 피고의 저작권을 침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이러한 행위를 저작권법상 금지되는 복제행위라고 본다면, 위 프로그램을 컴퓨터 등에 설치·사용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저작권법상 금지되는 복제행위가 있었다는 것이 된다).
위 판례의 결론은, 번들로 제공된 서체파일이 자동으로 다른 프로그램에서 인식되어 이를 사용하더라도, 이를 저작권 침해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 프로그램에 이미 내장되어 있는 서체가 자동으로 다른 프로그램에도 뜨게 된 경우에도 그 서체를 사용할 수 있다.
4. 서체프로그램을 사용해서 만든 결과물에는 서체프로그램 저작권의 힘이 미치지 않는다.
서체프로그램 저작권 분쟁에는 여러 버전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서체의 저작권과 서체프로그램의 저작권 혼동에서 기인하는 <결과물 사용제한> 버전이다.
이미 앞서 여러 번 설명했듯이, 서체 자체에 저작권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서체프로그램이 저작물로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에, 서체가 사용된, 즉 서체가 그려져 있는 결과물(인쇄물이나 문서파일 등)에 대해서는 서체프로그램의 저작권자가 그 어떤 주장도 제기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동안 서체프로그램 저작권 분쟁에서 주된 내용을 차지했던 게 바로 위와 같은 결과물의 사용에 트집을 잡는 <결과물 사용제한> 버전의 분쟁이었다.
위 버전의 주장을 주도했던 사람들의 논리는 이것이었다.
‘'서체를 사용하려면 라이선스(이용허락)가 있어야 하는데, 저작권자의 허락이 없는 상태에서 인쇄물 형태로, 또는 PDF 형태로, 전자책 형태로 서체를 사용했으므로, 이는 이용 허락을 받지 않은 저작물 이용으로서, 불법이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주장에 넘어가 고통을 받았다. ‘서체저작권’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니, 서체 자체에 저작권이 발생한다고 오해하였고, 서체 자체에 저작권이 발생한다고 생각하고 보니, 각종 형태의 결과물들에 서체가 사용된 게 맞아서, 내가 서체의 저작권을 침해한 게 맞나보다 라고 2차적인 오해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글과컴퓨터 사에서 긴급 공지를 돌려, 위와 같은 주장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었다.
당시 위와 같은 서체프로그램 저작권자의 주장에 혼란을 겪던 이용자들은, 한글과컴퓨터 사에 문의하였고, 한글과컴퓨터 사는, “당사 제품(한컴오피스, 한컴오피스 한글 등)에 포함되어 있는 **서체는 당사자 사용권 및 최종 제품에 탑재가 된 형태의 서체를 포함하여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사 정품소프트웨어를 통해 산출된 결과물(PDF, JPG, HWP등)을 홈페이지에서 e-Book, 다운로드, 게시 등의 형태로 서비스한다는 사유로 귀 기관(단체)에 별도의 폰트 사용료 지불을 요구하는 **의 주장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됩니다.”라는 공지를 돌렸다.
물론 위 공지에 법리적인 근거가 자세히 포함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많은 이용자들이 쉽게 현혹되지 않는 결과를 불러왔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결과물 사용제한> 버전의 주장이 법리적으로 잘못된 것인 이유는 명확하다. 서체에 저작권이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서체프로그램에 저작권이 인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체를 사용하여 만든 결과물은 서체프로그램 자체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오로지 서체의 모양만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물을 복제하고 게시하고 전송한다고 하여, 서체프로그램 자체가 복제되고 게시되고 전송되는 것이 아니다. 서체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그 어떤 저작권 침해도 발생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결국, 서체프로그램을 사용해서 만든 결과물에는 서체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서체프로그램 저작권의 힘이 미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서체와 서체프로그램을 혼동하여 저작권침해가 아닌 것을 저작권침해라고 오해하고 고민하였다.
서체프로그램 저작권자들이 이를 알면서도 일부러 감추고 거짓 주장을 한 저작권괴물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들도 혼동을 하여 실수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했던 이 혼란상을 볼 때, 역시 결론은, ‘서체저작권’이라는 말을 ‘서체프로그램 저작권’ 또는 ‘서체파일 저작권’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다. 잘못된 사고와 잘못된 언어의 관계는 닭과 달걀의 관계나 마찬가지이니까.
* 법무법인 민후 최주선 변호사 작성, 민후 로인사이드(2017. 1. 6.) 기고.